패턴으로서의 과학 : 과학은 발견된 사실의 총체일 뿐이다
“나 진짜 트라우마 걸릴 것 같아.”
간혹 보면 ‘트라우마’라는 단어를 ‘당 떨어졌다’, ‘커피 수혈하고 싶다’처럼 아무 때나 가볍게 사용하는 이들이 있다. ‘트라우마’는 용어 정의에 따르면 실제적이거나 위협적인 죽음 또는 심각한 사건 등을 본인이 직접 경험하거나 타인이 겪는 것을 목격한 사람이 겪는 정신적, 심리적 외상을 의미하는데, 이러한 심오한 뜻을 가진 단어를 가볍게 사용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걸릴 것 같다’라는 단어와 요상하게 조합을 해서 쓰고 있다. 트라우마는 원인일 뿐이고 그 자체로 질병이 아닌데 어떻게 ‘걸린다’는 말인가?
연구자들에 따르면 트라우마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이하 PTSD)를 비롯한 심각한 정신적, 육체적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는 원인이고, PTSD는 트라우마의 결과로 나타날 수 있는 질병들 중 하나다. 트라우마에 포함될 수 있는 사건으로는 (학자, 연구자들마다 다를 수 있지만 현재까지 합의된 바로는) 교통사고, 성폭행 등과 관련된 심각한 성적 폭력 문제, 전쟁이 있고 그 외에 인종차별이나 팬데믹 스트레스 등은 아직까진 논의의 대상이 될 뿐이다. 개인이 겪은 어떠한 괴로운 경험과 관련하여 이 경험과 기억으로부터 정신적, 신체적 외상이 발생했다고 확정적으로 말하기에는 전문가들에게도 애매한 부분이 있는 것이다.
심지어 M.R.I. 스캔을 통해 트라우마로 인한 PTSD를 겪고 있는 사람의 뇌 영역 활성도를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슬프거나 괴롭게 여겨지는 이야기(예: 가족의 죽음, 연인과의 이별 등)를 들을 때는 변연계에 포함된 해마의 활성도가 높게 나타났다. 하지만 환자의 트라우마와 관련된 기억을 들을 때는, 그것이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그저 ‘기억’을 듣기만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해마가 활성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생각이나 백일몽 등 내적인 사고 과정에 관여하는 후대상피질(Posterior Cingulate Cortex, 이하 P.C.C.)이 활성화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즉 트라우마로 환자를 자극하게 되면 해당 기억은 과거에 발생했던 것이고 현재는 그런 일이 전혀 일어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뇌는 마치 ‘지금’ 그 트라우마와 관련된 일이 발생하고 있는 것처럼 처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트라우마로부터 비롯된 PTSD를 겪고 있는 사람은 같은 이야기를 들어도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과도한 정서적 반응을 보이고 심지어는 스스로의 육체적 통제 능력을 잃게 되기도 한다.
기존의 연구에 따르면 트라우마와 관련된 환자의 반응은 스트레스와 관련된 영역이라고 알려진 변연계의 편도체와 해마가 관여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최근 M.R.I. 스캔 연구를 통해 PTSD가 유발되는 새로운 경로가 발견되었다. 그간의 PTSD를 치료하는 방법으로는 전문가와 함께 문제가 되는 기억에 환자를 지속적으로 노출시키고 계속해서 그것을 직시하게 하거나, 물리적으로는 안구 운동을 둔감하게 하는 등의 방법을 써왔다. 문제가 되는 기억을 마주할 때 드러나는 스트레스 반응을 살피고 이를 의도적으로 억누를 수 있도록 해왔을 뿐, 근본적인 해결 방법은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PTSD를 유발하는 트라우마가 뇌에서 처리되는 경로와 과정이 M.R.I. 스캔을 통해 새롭게 드러난 만큼, 그간의 치료 과정에서 효과를 보지 못했던 트라우마 환자들에게는 새로운 치료법이 제공될 수 있게 될 것이다. 예를 들면 PTSD가 심한 환자에게서 P.C.C.의 활성화가 심하게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환자가 트라우마에 노출되었을 때 P.C.C.의 활성도를 낮출 수 있도록 하는 등의 방법으로 말이다.
최근의 연구로 인해 치료 가능성이 좀 더 높아졌고 새로운 가능성이 발견되었을 뿐, 여전히 과학과 의학에서 100%는 없다. 절대적인 것도, 완전한 것도, 꼭 들어맞는 것도 없다. 모든 것이 합의이고 발생하는 것들과 발생 가능성 있는 것들의 패턴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트라우마’라고 할 수 있는 사건들에 대한 전문가들의 의견도 일부 일치, 일부 불일치 했고,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경로가 발견됨으로써 기존 합의의 내용이 달라질 가능성도 생겼다.
트라우마 또한 나에게서 발생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 있는 사건들의 무수한 조합에 의해서 내가 겪게 된 것이고, PTSD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우리는 과학에서도 의학에서도 삶에서도 패턴을 벗어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