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생명은 왜 삼성카드를 살렸나? 2003년 카드대란의 이면

삼성생명이 삼성카드의 부실 위기를 막기 위해 자금을 투입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이미지

글 읽기 : 차기태 - 이건희의 삼성, 이재용의 삼성

책상 위에 쌓인 자료들은 단순한 위기 극복의 연대기가 아니다. 삼성카드, 그리고 그 구원투수로 등판한 삼성생명. 이 서사는 2003년 신용카드 대란이라는 거시적 배경 아래, 한국 재벌 시스템의 작동 방식과 금융 규제의 한계, 그리고 정교한 자본 동원 메커니즘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한 편의 금융 스릴러에 가깝다. 읽어 내려갈수록 그들의 대담함과 위기관리 능력에 대한 경탄과 함께 과연 이것이 '공정한 규칙' 아래 벌어진 게임이었는지에 대한 깊은 회의감이 교차한다. 시스템을 이해하고 이용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는 이렇게 극명한 것인가.

2003년, 무분별한 카드 발급 경쟁의 후폭풍이 대한민국을 덮쳤다. 신용불량자가 속출하고 카드사들은 연체율 급등으로 줄도산 위기에 내몰렸다. 삼성카드 역시 이 재앙적인 파도를 피하지 못했다. 여기에 부실 계열사인 삼성캐피탈까지 흡수합병하면서 재무 상태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생존을 위한 유일한 길은 대규모 자본 확충. 1조 원 규모의 유상증자 계획이 발표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자금 조달이 아니라, 그룹 차원의 생존 투쟁 선언이었다.

문제는 이 거대한 자금을 누가, 어떻게 조달하느냐였다. 핵심 계열사인 삼성전자의 참여는 당연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그룹의 '현금 저수지'인 삼성생명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당시 삼성생명의 발목을 잡는 강력한 규제가 있었다. 바로 '5+3 원칙'으로 불리는 보험업법상의 출자 한도 규제였다.

'5+3 원칙'이란 무엇인가? 이는 김대중 정부 시절 외환위기의 원인 중 하나로 재벌의 무분별한 확장과 계열사 부실 전이가 지목되면서, 이를 차단하기 위해 도입된 강력한 금산분리 강화책이었다.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5% 룰 (주식보유 한도): 보험회사는 원칙적으로 다른 회사(특히 계열사)의 의결권 있는 발행주식 총수의 5%를 초과하여 소유할 수 없다. (이는 이후 보험업법 제106조 등에서 일부 변형/강화됨)

3% 룰 (계열사 총 출자 한도): 보험회사가 계열사에 출자(주식 매입, 유상증자 참여 등)할 수 있는 총 금액은 원칙적으로 자기 회사 총자산의 3% 또는 자기자본의 60% 중 적은 금액 이내로 제한된다. 이것이 삼성생명에게 직접적인 제약이었다.

당시 삼성생명의 자산은 64조 원으로, 3% 기준으로는 약 1.92조 원까지 계열사 출자가 가능했다. 하지만 이미 다른 계열사 투자로 1조 5천억 원 가량이 묶여 있어 새롭게 동원할 수 있는 자금(출자 여력)은 4~5천억 원 수준에 불과했다. 1조 증자에 필요한 7천억 원 이상의 자금을 투입하기에는 명백히 한도가 부족했던 것이다. 금융감독위원회 역시 이를 근거로 삼성생명의 대규모 출자가 어렵다고 판단했다. '원칙'대로라면 삼성생명은 삼성카드를 구제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자금을 댈 수 없었다.

여기서 삼성은 법 조항 속 '예외'를 찾아낸다. 보험업법 제107조. 이 조항은 '금융기관 부실 정리 또는 기업 구조조정 촉진' 등 특별한 사유가 있을 경우, 금융감독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계열사에 대한 신용공여(대출, 보증 포함) 및 출자 한도를 일시적으로 초과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즉, 평상시에는 굳게 닫혀 있는 문을, 비상시에는 열 수 있는 '비상 탈출구' 같은...

Comment

여러분들을 위한 공간입니다. 다양한 생각을 나누는 장이 되길 바랍니다.

hide comments
...
Back
Cart Your cart 0

장바구니에 상품이 없습니다.

Total0
구매하기
Empty

This is a unique website which will require a more modern browser to work!

Please upgrade tod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