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종합화학의 몰락: 이건희, 석유화학, 실패한 제국의 기록

삼성종합화학의 부실화 과정을 상징하는 푸른 빛 풍경

글 읽기 : 차기태 - 이건희의 삼성, 이재용의 삼성

책장을 넘기는 손끝이 무겁다. 삼성의 석유화학 진출사. 단순한 기업 연혁이라 치부하기엔 그 안에 담긴 야망과 좌절의 무게가 너무도 선명하다. 누군가는 ‘또 하나의 사업 확장’이라 기록하겠지만 내 눈에는 거대한 파도에 맞서 필사적으로 노를 젓거나, 혹은 스스로 불길에 뛰어든 나방의 이야기가 보인다. 성공과 실패, 그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서 춤을 춘 거인의 기록. 그 안에는 내가 혐오하고, 또 갈망하는 모든 것이 담겨 있다.

석유화학. 이름부터가 이미 거대하다. 검은 황금, 원유를 정제해 얻은 나프타를 깨부수고 재조립하여 세상 모든 것을 만드는 연금술. 플라스틱, 섬유, 약품, 페인트… 이 문명을 지탱하는 실핏줄 같은 산업이다. 기반이 튼튼해야 한다고? 당연한 소리. 천문학적인 돈과 최첨단 기술, 그리고 끊임없이 요동치는 시장의 흐름을 읽는 눈. 그 모든 것을 갖춰야만 비로소 이 거대한 룰렛 게임에 칩을 던질 자격이 주어진다. 성공하면 세상을 얻지만 실패하면 모든 것을 잃는다. 매력적이지 않은가. 언제나 그렇듯, 가장 큰 위험 뒤에는 가장 달콤한 보상이 숨어 있는 법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창업주 이병철의 꿈, 한국비료에서 비롯된다. 농업 혁신이라는 거창한 명분. 하지만 시대는 그의 편이 아니었다. 사카린 밀수 사건. 한순간의 오점은 거인의 꿈을 국가에 헌납하게 만들었다. 오랜 시간이 흘러 1994년, 아들 이건희는 그 회사를 다시 사들여 삼성정밀화학 간판을 내건다. 아버지의 숙원, 뒤늦은 회복. 2300억 원이라는, 그들의 스케일에 비하면 ‘비교적’ 가벼운 대가로 ‘한풀이’를 했다는 대목에선 쓴웃음이 나온다. 과연 순수한 숙원이었을까, 아니면 빼앗긴 것에 대한 집념이었을까.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되찾았다는 사실, 그리고 다시 전장으로 나섰다는 것이다.

이건희 시대의 진짜 승부수는 삼성종합화학이었다. 1988년, 서산 앞바다를 메워 95만 평의 왕국을 세우겠다는 선언. 기공식에는 대통령까지 참석했다. 국가조차 이 위험한 도박에 기대를 걸었다는 증거다. 1조 3천억 원. 예상보다 5천억이 더 들어갔다. 이런 게임에서 예산 초과는 변수가 아니라 상수다. 중요한 것은 이 정도의 출혈을 감수하고서라도 판에 뛰어들었다는 그 ‘의지’다. 기초유분부터 최종 제품까지. 모든 것을 한 손에 쥐겠다는 야망. 거대 장치산업은 한번 돌아가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톱니바퀴다. 막대한 이자와 감가상각비는 매 순간 살을 파고드는 채찍질과 같다. 버티거나, 혹은 부러지거나.

이 산업의 잔인함은 시장의 변덕스러움에 있다. 유가와 경기는 조울증 환자처럼 널뛴다. 수요가 폭발하면 가격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지만, 침체의 골이 깊어지면 속절없이 곤두박질친다. 그 칼날 위에 선 곡예사. 삼성종합화학은 태생부터 거대한 빚더미를 안고 있었다. 외부 충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운명. 설상가상, 현대 역시 같은 시기, 바로 옆 동네에 비슷한 규모의 왕국을 건설하고 있었다. 정부의 규제가 풀리자 기다렸다는 듯 달려든 두 거인. 결과는 불 보듯 뻔했다. 제 살 깎아먹기. 하지만 그들은 멈출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밀리면 끝장이라는 절박함, 혹은 오기. 그것이 그들을 파멸로 이끌었을지라도.

1991년, 공장이 돌아가기 시작했을 때 시장은 얼어붙었다. 수요는 줄고 가격은 폭락했다. 원료인 나프타 가격은 요지부동. 첫해 적자만 1천억. 시작부터 불길한 징조였다. 하지만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숙이 발을 담갔다. 공장을 확장하고, 새로운 설비를 들였다. 아시아 최대 규모 SM 공장, PTA 공장… 규모의 경제만이 살길이라 믿었을 것이다. 더 크게, 더 많이. 그것만이 앞을 가로막는 벽을 부술 유일한 망치라 여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라는 거대한 해일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새 공장은 멈춰 섰고, 빚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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