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엘리트 21: 물을 수 없는 질문

“신자가 아니신가요?” 미사를 마치고 예배당을 나가는 길에 신부님이 제게 물으셨습니다. 저는 “기독교인입니다.” 이렇게 말하려다 스스로 민망해서 “네.”라고 대답했습니다. 교회를 나가지 않은 지 몇 년이 넘었습니다. 저는 한 번도 성령이라는 걸 느껴본 적이 없으며, 마음 속깊은 곳에서는 성경을 고대 그리스 신화처럼 하나의 이야기로 취급하고 있습니다.

‘그래, 아름다운 이야기지. 하지만 내 삶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걸.’ 이런 식으로 난 성경을 멀리합니다. 내가 기독교인인 이유는 오로지 나의 부모님이 기독교인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난 기독교 뿐만 아니라 그 어떠한 종교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나는 차라리 과학을 믿으려고 합니다. 난 빅뱅이나 진화론이나 양자역학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지만 그냥 그것을 믿는 것이 신을 믿는 것보다는 합리적인 선택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성체는 원래 신자가 되어야만 모실 수 있는 거예요. 몇 번 미사에 참석해 보시고 마음에 맞으시다면 신자가 되시길 권해드릴게요. 또 다음 미사에서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신부님이 성당을 나가려 하는 내게 말씀하신다.

“네. 감사합니다.” 나는 이렇게 말하고 성당을 나갑니다. 난 내가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합리성. 인간의 이성. 인간이 해내지 못할 것은 하나도 없으며,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은 과학이 발전한 미래에는 이루어질 수 있다는 낙관적인 믿음. 종교는 단순히 내 삶을 풍요롭게 살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는 생각. 예수는 이제 신이라기보다는 동기 부여 강사 혹은 인생 코치가 되어버린 오늘의 시대. 난 여기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성에 대한 믿음은 날 지치게 만듭니다. 그것은 삶에서 우연의 영역을 없애 버리고 기적의 영역을 말살시키며 경이로움의 순간들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모든 것들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난 이런 세상에 지쳤습니다. 하지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난 내 인생 내내 인간 합리성을 찬양하는 교육을 받아왔습니다. 중세적 암흑에서 벗어나 계몽의 빛을 밝힌 것이 인간의 역사라고 배워왔습니다. 신 없이도 인간은 잘 살 수 있다고, 신을 죽인 것이야말로 인간의 자유를 뜻한다고 배워왔습니다. 난 그것을 그냥 받아들입니다.

나는 분명… 나는 분명 물질로 환원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원합니다. 나는 인생 코치로서의 예수를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신으로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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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엘리트 20: 철학의 문

“철학은 정말 중요하지. 철학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과 똑같거든. 철학이 왜 중요한 거 같아? 삶의 의미를 알려줘서? 올바른 사회란 어떤 것인지 알려줘서? 아직도 이런 개소리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런 개소리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있지. 이런 사람들은 철학이 오히려 삶을 망치지.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사회적 실패를 감추는 도구로 철학을 활용하니까. 뭐, 나는 돈 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공부를 하고 있다는 식으로 자위하는 거지. 멍청한 사람은 철학 하면 안 돼. 철학에 민주주의는 없어.”

“나는 그런 생각 한 적 없어요”

“너는 동물이나 다를 바 없으니까 그렇지. 좋은 거야. 난 네가 부러워. 한 마리의 원숭이처럼 살 수 있다면, 한 그루의 나무처럼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난 그럴 수 없었지. 왜? 난 너보다 지성이 발달했으니까. 오해는 마. 널 무시하는 게 아니야. 난 지금 생물학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도대체 언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인간은 진화를 하면서 본능을 버리고 지성을 선택했어. 인간이 뭐라고 생각해? 지성적 동물이 바로 인간이야. 그런데 제발 무식한 소리는 하지 마. 여기서 말하는 지성이 무슨 IQ 말하고 그런 거 아니야. 여기서 말하는 지성은 추상화의 능력이고 곧 수학적 능력이야. 수학이 뭐라고 생각해? 패턴을 발견하는 게 수학의 전부야. 너 수학 못 하지? 그래서 내 말 무슨 말인지 모르지? 그래도 적어도 ‘문제 유형’이라는 말은 들어봤을 거야. 그렇지? 인간은 수학 문제를 유형에 따라 분류하잖아. 이렇게 분류한다는 거 자체가 패턴을 찾아냈다는 거야. 이 능력이 바로 지성이라는 거고 플라톤과 데카르트가 그토록 찬양하던 능력이지. 넌 플라톤이 유클리드 기하학을 찬양하고 데카르트가 해석 기하학을 만들어낸 게 우연이라고 생각해? 절대 우연이 아니야. 플라톤과 데카르트가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거라고. 플라톤이 이데아를 말했고 데카르트가 사유함이 곧 존재함이라고 말했다는 건 우리 집 강아지도 알아. 도대체 저 말이 어떤 뜻을 함축하고 있고 우리 삶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알아내는 게 중요한 거야. 삶이 없으면 철학도 없어. 철학은 삶은 제대로 살기 위한 거지 무슨 똑똑한 척하려고 있는 게 아니야. 인간은 다 지성적 동물이지만 지성 발달에는 차이가 있어. 너 같은 애는 지성 발달이 좀 더딘 거지. 그래서 동물처럼 사는 거야. 먹고, 자고, 싸고… 그걸로 끝이지. 정말 부러워. 정말 너무 부럽다고.”

“저는 그렇지 않아요.”

“뭐가?”

“저는 아니에요.”

“봐. 정말 부럽다니까. 너 말하는 거 언제 녹음 한 번 해봐. 정말 동물과 다를 바가 없다고. 지성이 딸린다는 거지. 그런데 지성도 문제가 있어. 지성은 자기 능력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자기가 알 수 없는 것까지 알 수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지. 헛똑똑이들이 바로 이런 인간들이야. 이들은 너처럼 동물 같지는 않아. 적어도 지성이 있고 시험도 몇 개 합격했지. 그런데 이렇게 어중간하게 똑똑한 인간들은 정말 오만해.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너 “세상은 수학으로 이루어져 있다.”라는 말 들어봤지? 이런 말 하는 사람이 전형적인 헛똑똑이지. 왜 그런지 알아? 지성은 있잖아, 사자의 이빨처럼 그저 삶을 살기 위한 도구에 불과해. 인간은 진화의 과정에서 날카로운 이빨이 아닌 지성을 삶의 도구로 선택한 것뿐이야. 그런데 헛똑똑이들은 지성이 마치 세계의 ‘본질’을 파악할 신이 주신 능력이라고 생각하지. 그래서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이 나온 거야. 플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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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엘리트 19 : 도망갈 거지?

“너 대학 어디 나왔어?”

“저요? 저는 뭐 그냥…”

“별로 안 좋은 대학 나왔나 보네. 말을 끄는 거 보니까. 말하기 싫으면 말 안 해도 돼. 네가 어떤 인간인지 알겠으니까.”

“네? 제가 뭐 어떤 인간이라는 거예요?”

“넌 스스로에게 진실하지 못하고 있는 그대로의 너를 마주할 용기가 없고 열등감에 찌들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척 하려고 애쓰는 사람이지.”

“제가요?”

“너 지방에 있는 대학 나왔지? 그래서 대학 물어보면 움찔해서 말을 질질 끌었던 거고. 그런데 지방에 있는 대학 나오든 말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거든. 그건 그냥 과거의 일이고 끝난 일이야.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가 중요하지. 그런데 넌 아직도 과거에 갇혀 있어. 여전히 너는 네가 네 성적보다 낮은 학교에 입학했다고 생각하며 대학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겠지. 그런데 네 대학이 그냥 네 수준이야. 너의 실력? 너만 아는 너의 실력? 그건 그냥 자위도구지. 너의 수능 성적표와 너의 대학교가 네 수준이야. 다른 건 없어. 그러면 우선 너는 네 수준이 낮다는 걸 인정해야 해. 자기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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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엘리트 17 : 도망가지 않는다

쓸모 없이 보내는 날들. 사는 건지 죽은 건지 알 수 없는 날들. 그 시간들 속에서 나는 보았다. 도망자이자 비겁자인 나를. 누가 나의 삶을 이렇게 만들었는가? 나 말고 누가 내 삶을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는가? 비겁한 자신이여! 왜 나를 돌아보지 않는가! 그리고 왜 변하려고 하지 않는가! 난 달라져야만 한다. 난 정말 달라져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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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유롭고 싶습니다. 아니, 나는 자유롭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난 몰랐습니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걸. 자유는 사실 한 없이 무거운 거라는 걸. 실제로 자유가 오면 난 한없이 도피하고 싶어진다는 걸.

나는 두 가지 조건에 얽매여 있습니다. 하나는 물질적 조건이고 하나는 정신적 조건입니다. 이 조건들이 내게 가하는 고통을 마주할 때, 이 고통들을 어떠한 불평도 없이 내 것으로 인정할 때 나는 자유로울 수 있겠지요.

물질적 조건부터 말하겠습니다. 나는 돈을 벌어야 합니다. 그 누가 물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나는 사회에 기생하며 살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내 몫은 내가 벌어야 합니다. 하지만 가끔 도망치고 싶습니다. 물질을 얻기 위해서 나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남에게 머리를 조아려야 하고 끊임없이 머리와 몸을 움직여야 합니다.

하지만 왜 그렇게 하지 않아야 하나요? 내가 왜 남에게 머리를 조아리면 안 되는 사람일까요? 내가 왜 몸과 머리를 끊임없이 사용하지 않고 쉽게 돈을 벌어야 하는 사람일까요? 그 어떠한 이유도 없습니다. 내 오만과 자기 과신 말고 그 어떠한 이유도 없습니다. 돈이 없다면 남의 똥이라도 치워야 하는 게 나입니다. 돈이 없다면 법이 허락하는 어떠한 일이라도 해야 하는 게 나입니다.

누군가는 정신을 강조합니다. 물질보다 정신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정신과 물질을 서로 옆에 있는 것이지 위아래 있는 게 아닙니다. 자유롭게 나는 새는 공기가 자신의 날갯짓을 방해한다고 생각합니다. 공기가 있기에 자신이 날 수 있다는 걸 모르고서.

도망칠까요? 내 글은 진정한 예술인데 이 빌어먹을 시장 질서 때문에 내가 피해를 보고 있다고 한탄하며 살아볼까요? 내 음악이야말로 고차원적인 음악인데 빌어먹을 기획사 시스템 때문에, 쓰레기 같은 귀를 가지고 있는 대중들 때문에 내 음악이 묻혔다고 자위하면서 살아볼까요? 저는 그렇게 하고 싶은 강력한 충동을 느낍니다.

“이 세상이 쓰레기다, 내가 잘못된 게 아니라 이 세상이 잘못된 것이다.”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나는 돈을 버는 것보다 더 고상한 일을 하고 있다며 자위하고 싶습니다. 나는 단순히 상업적인 예술을 하는 게 아니라 진정한 예술을 하고 있다고 말하며 정신승리를 하고 싶습니다.

독서클럽에 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자위를 합니다. 그들은 칸트를 읽지도 않고 칸트를 논합니다. 그들의 형이상학은 여기저기로 나아갑니다. 그렇게 자신이 사회에서 실패했다는 걸 감춥니다. 자신이 패배자라는 사실을 고상하게 숨깁니다. 나는 먹고사는 것보다 더 고상하고 더 고차원적인 일을 하고 있다며 정신승리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단일한 차원에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고차원에 있지 않습니다. 철학의 존재 이유가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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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엘리트 16 : 평범한 날

그가 토를 했다. 우리는 가위바위보를 했다. 내가 졌다. 나는 구토 위에 무지막지한 양의 휴지를 덮었다. “고객님 잠시만요.” 고객 새끼가 비킬 생각을 안 하고 의자에 앉아있다.

이 세계에서는 고객이 왕이고 내 세계에서는 고객이 좆이다. 하지만 내 세계는 언제나 이 세계보다 힘이 약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실존적 고뇌를 느끼고 구토를 하게 된다. 이게 사르트르와 카뮈의 주장이다. 철학자들은 이걸 실존주의라고 부른다. 거짓말이다. 그냥 똑똑해 보이고 싶어서 말해봤다.

화장실 칸에 여자가 쓰러져 있다고 한다. 1시간 째 안 나오고 있다고 한다. 네? 내가 화장실로 달려갔다. 무릎을 땅에 딛고 화장실 칸 밑을 바라 보았다. 여자 다리가 보였다. 진짜 쓰러져있는 것 같아서 119를 불렀다. 그들이 문을 열었고 그녀는 술에 꼴아서 자고 있었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내가 물었고 그녀는 정신을 차렸다. 뭐예요? 그녀는 나에게 물었다. 네? 내가 다시 물었다. 왜 함부로 저 사람들을 불러요? 왜 함부로 문 열어요? 119를 가리키며 그녀가 말했다. 씨발년이 지금 뭔 소리를 하는 거지?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저 잠깐 쉬고 있는 거거든요. 저 멀쩡하거든요. 진정하라는 119 대원의 말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난 살인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난 이 여자가 나중에 결혼에서 매일 밤 남편한테 뒤지게 맞고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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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를 사고 싶다. 일을 마치고 나오면서 이런 생각을 해봤다. 부엌이 엄청나게 큰 아파트. 거실도 엄청 넓은 아파트. 난 요리를 할 것이다. 하고 싶은 요리를 몇 개 공책에 적어 놓았다. 간장 소스를 베이스로 한 파스타. 거기에 우삼겹을 구워서 얹을 것이다. 부추도 볶아서 넣을 거고.

또 스테이크 볶음밥도 해 먹을 것이다. 쿠팡에서 썰어진 야채를 냉동으로 판다. 가격도 싸다. 게다가 유기농이다. 난 칼질을 못 하니까 야채는 그걸로 쓰면 된다. 스테이크는 따로 구워서 볶음밥 위에 올릴 것이다. 맛있겠다. 언젠가 그런 걸 먹는 날이 올 것이다.

강아지도 한 마리 키울까? 아니다. 난 이미 한 마리의 강아지를 무지개다리 너머로 보냈다. 마음 아플 일은 애초에 만들지 말아야 한다. 인연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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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엘리트 15 : 엄마

엄마는 지방직 공무원으로 자기 직업에 매우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것 아니면 가질 게 없기에.

“요즘 큰 딸 어때요?”

“잘 지내겠죠. 저는 자식을 내놓은 듯이 키워서요. 대학 등록금이랑 생활비도 자기가 다 과외해서 벌고 있네요. 20살 넘어가면 자식은 그냥 남이죠. 안 그래요?”

엄마는 자식 질문에 언제나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자신은 자식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부모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자기 자식은 이렇게 독립적인 인간이라는 걸 자랑하기 위해.

아, 엄마! 당신이 내 대학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했는지, 당신이 당신 동료의 자식들과 나를 얼마나 비교했는지, 그리고 내가 그들을 입시에서 이겨서 얼마나 행복해했는지 나는 봤어요. 엄마, 행복한가요? 그렇게 자기 스스로를 기만하고 살면? 그렇게 자기 자신을 속이고 살면?

그 누구보다 다른 사람을 이기고 싶어 하는 우리 엄마. 서울 생활에서 실패해서 집 안에 틀어박혀 있는 딸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얼마나 많은 밤을 분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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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엘리트 14 : 저 사람을 보라

무엇인가? 내 마음속에 있는 이 어둠은? 어둠은 내 처지의 원인인가, 아니면 결과인가? 아! 나를 보라. 당당히 서울로 올라갔던 나는 이제 고개와 어깨를 내리고 또 내린 채 시골로 돌아왔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시골에 사는 인간들의 자위도구가 되고 말았다.

그들은 말한다.

저 사람을 보라! 서울에 가는 게 무슨 소용인가? 그녀는 서울에서 노예와 같은 생활을 했다. 아, 그녀는 말했다! 자신은 언젠가 영주가 될 것이라고! 아, 그녀는 말했다. 나는 현재의 고통을 미래의 영광과 바꾸었느라고! 오호라! 오호라! 정말 그랬던가? 그렇다면 그녀는 왜 지금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는가? 나는 서울 한 번 가지 않고 시골의 영주가 되었노라. 서울에 간 그녀는 서울에서 노예가 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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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엘리트 13 : 우정은 없다

여기서 살인사건 일어나신 거 아시죠? 전 놀라지는 않았어요. 인간은 다른 인간을 죽이고 싶은 욕망이 있으니까요. 살인 했을 때 자신에게 닥칠 법적 처벌의 두려움 때문에 그 욕망을 간신히 누르는 것이죠. 인터넷이나 SNS의 댓글 창은 좋은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물리적인 살인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겪는 욕구불만을 풀 수 있는 장소가 댓글 창이니까요. 물론 저는 지금 별 볼 일 없는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뛰어난 인간은 욕망을 승화할 줄 알죠.

어찌 되었든 최서인이 김인수를 죽였습니다. 목을 찔렀다고 하네요. 저는 두 사람을 잘 모릅니다. 단지 같은 학교에 다닌 적이 있었을 뿐이죠. 그래도 최서인이 김인수를 왜 죽였는지는 알 것 같네요. 열등감과 질투 때문이죠. 제가 지금 느끼고 있는 그 감정 말이예요.

저는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가난하거나 못생긴 사람과는 상종을 하지 말라는 거였죠. 저는 무척 화가 났습니다. 어떻게 인간을 저렇게 나누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죠. 그 사람은 그러더군요. 가난한 것도 문제가 아니고 못생긴 것도 문제가 아니다. 그런데 가난하거나 못생긴 사람은 열등감과 질투에 사로잡힐 확률이 많다. 그런 인간들은 기회만 있으면 다른 인간을 파괴하려 든다. 생각이라는 걸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이미 열등감과 질투로 자기 자신을 잃었으므로.

김인수와 최서인은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인데 공무원 시험을 함께 준비했다고 하네요. 여기처럼 조그마한 시골에는 학교가 얼마 없어서 초등학교 때 학교를 같이 다닌 아이들과 고등학교 때까지 학교를 같이 다니는 경우가 많죠. 김인수와 최서인이 바로 이런 경우였습니다. 두 사람은 티격태격 했지만 어찌 되었든 붙어 다녔습니다. 밥도 같이 먹었고 게임도 같이했다고 하네요. 남자든 여자든 찌질한 애들은 몰려다니는 버릇이 있는데 김인수와 최서인은 둘만 같이 다닌 건지 아니면 다른 애들과 함께 몰려다닌 건지는 모르겠네요.

어찌 되었든 두 사람은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고 합니다. 다른 걸 뭘 할 수 있겠나요? 김인수는 붙고 최서인은 떨어졌습니다. 김인수는 기뻤을까요? 기뻤겠죠. 시골에서 공무원 합격은 예전으로 따지면 장원급제 같은 거니까요. 김인수는 최서인을 위로했을까요? 물론 그랬겠죠. 하지만 진심은 아니었을 겁니다. 위로를 하면서 엄청난 승리감을 맛보고 있었죠. 나는 너보다 이렇게 뛰어나지만 그 우월함을 감추고 위로까지 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요.

최서인은 어땠을까요? 김인수를 축하해 주었을까요? 당연히 그랬겠죠. 겉으로는 말이죠. 속은 쓰리다 못해 뒤집어졌겠죠. 국가가 공식적으로 김인수가 최서인보다 똑똑한 사람임을 인증해 주었으니까요. 친구 간에 승부욕이 없을 것 같나요? 당신은 현실적인 사람이니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죠. 친구 간에 승부욕이 없는 경우는 단 하나죠. 내 친구가 도저히 내가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날 때 나는 승부욕을 접게 되죠. 이 경우도 사실 승부욕이 없는 경우는 아니죠. 이길 수 없을 것 같으니 미리 꼬리를 내리는 거죠. 그러면 적어도 패배하지 않을 수는 있으니까요. 도전 자체를 하지 않았으니 말입니다.

이렇게 한 사람은 마음속에 우월감은 다른 한 사람은 마음속에 열등감을 품은 채 시간이 흘렀습니다. 김인수는 공무원 생활이 힘들다고 느낄 때면 최서인에게 전화를 걸고 말했죠.

“야, 공무원 별 것 없어.”

“없는 월급 모아서 차 한 대 뽑았어.”

“공무원 완전 박봉이야. 할 일 없으니까 하는 거지. 아파트 사려면 3년 정도 걸릴 것 같다.”

뭐, 이런 식의 말을 한 거죠. 김인수는 자기의 깊은 불행함을 – 그는 유튜브에서 돈 자랑하는 사람들을 보며 불행을 느꼈습니다 – 최서인을 통해 얇은 불행으로 바꾸려 한 거죠. 김인수가 정말 자기 삶의 고달픔은 최서인과 상의하기 위해 저런 전화을 한 걸까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정신병원으로 가야죠. 김인수는 우월감을 느끼기 위해 최서인에게 전화를 한 겁니다. 거지에게 적선하며 자기 불행을 잊는 귀부인처럼요. 귀부인이 거지를 자신을 위해 이용하듯 김인수도 자신을 위해 최서인을 이용한 거죠.

최서인은 자존심이 상하고 모멸감마저 느꼈겠죠. 그런데 뭐 어쩌겠어요? 김인수가 교묘하게 자기 힘듦을 토로하는 방식으로 우월감을 말하니 최서인은 화를 낼 수조차 없었죠. 최서인이 김인수에게 화를 내면 김인수는 이렇게 말하겠죠.

“야, 왜 그래? 나는 정말 그냥 힘들어서 전화한 거야. 네가 시험 때문에 예민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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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엘리트 12 : 고향 친구

하나둘 하나둘, 너의 눈은 감기네 하나둘 하나둘, 나의 오랜 친구야 하나둘 하나둘, 내 칼날은 네 목에 하나둘 하나둘, 너의 눈은 감기네

왜 그랬니 왜 그랬니, 왜 나를 모욕했니? 왜 그랬니 왜 그랬니, 우린 오랜 친구잖아 왜 그랬니 왜 그랬니, 왜 나를 무시했니? 왜 그랬니 왜 그랬니, 땅을 붉게 적시네

기억하니 기억해? 일이 힘들다며 내게 전화하던 날을? 기억하니 기억해? 넌 합격생, 나는 아직 수험생인 그때를? 기억하니 기억해? 날 이용해 자존감을 올리려던 널? 기억하니 기억해? 합격해도 별것 없다고 내게 말하던 널?

왜 그랬니 왜 그랬어? 우린 오랜 친구잖아 왜 그랬니 왜 그랬어? 너와 나는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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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엘리트 11 : 귀향

나는 몰래 스타트업을 그만두었어. 미래가 없었기에. 어떻게 합리화할 수 있을까? 친구들 앞에서? 나는 그들에게 내가 스타트업을 선택한 거라 말했는데. 대기업도 갈 수 있고 행정고시도 합격할 수 있지만 창의적인 내게 맞는 일을 ‘선택’했다고 말했는데. 불가능하잖아. 합리화가. 그래서 도망쳤어. 고향으로. 그렇게 난 가족과 고향 친구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네. 모두가 나를 보며 자기 위안을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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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에서 태어난 애들은 스카이 아니면 서울로 대학 안 가는 게 맞아. 괜히 어중간한 대학 가서 서울 뽕만 들어가지고 온다니까. 취직 못 해서 결국 공무원 시험 준비할 거면서 그놈의 서울 타령. 지겨워 아주. 지방대 다니는 애들이랑 지들이 다를 게 뭔데? 부모 등골만 더 빼먹지. 불효야 불효.”

"언니, 그건 아니야. 스카이여도 서울로 보내면 안돼. 이과면 괜찮은데 문과는 스카이도 소용없어. 괜히 지 주제 모르고 스카이 갔다고 설쳐대다가 인생 망한 애들 내가 많이 봤어. 스카이 들어가면 친구들이 다 있는 집 자식들이고 고등학교도 좋은 곳 나온 애들이니까 지는 열등감이 드는 거야. 왜 우리집은 이렇게 못 살까, 왜 우리 부모님은 이거 밖에 못 해줄까 하면서 막 부모를 원망해. 해준 건 생각도 안하고. 지방에서 태어난 애들은 그 지역에 있는 국립대 가는 게 제일 좋아. 쫌만 열심히 하면 장학금도 받을 수 있고."

"맞지, 맞지."

이모와 엄마는 신났다. 왜냐면 내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난 이번 추석을 목 빠지게 기다렸다. 친척들에게 내가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는 것을 자랑하려고. 그동안 받은 잔소리에 대해 복수하고, 나한테 잔소리를 한 어른들에게 지들 자식들이나 걱정하라고 말해주려고.

요즘 늙은 것들은 돈도 안 주면서 말만 존나 많다. 지들 인생이 나보다 더 병신이면서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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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엘리트 10 : 나만의 편지

그의 음악이 들린다. 그는 결국 자신이 원하던 길로 들어갔다. 매일 새벽마다 그는 동대문에서 옷을 나르는 일을 했다고 한다. 돈을 벌기 위해. 그리고 그 돈으로 꿈을 향해 나아간 거야. 내가 서울대학교라는 간판에 안주할 때, 내가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에 집중하지 않고 나를 꾸며내려 노력할 때, 그때 그는 자기를 마주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네. 아니, 그는 두려워도 계속 자신을 마주했네. 진실하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나는 무엇일까. 나는 정말 무엇일까. 붙일 수 없는 편지만 쓰는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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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랑을 말하지.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문득문득 옆을 돌아봐. 문득문득 뒤를 돌아봐. 너는 없어. 나는 안도하지. 다행이야, 네가 있었다면 나는 글을 계속 쓸 수 없었을 테니까.

내가 뭐라고 쓸 것 같아? 사랑에 대한 이런저런 감상들을 지껄여. 그리고 마지막에는 내가 얼마나 마음 따뜻한 사람인지 나타내는 문구를 덧붙이지. 내가 사랑을 향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온 세상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해. 난 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은근히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야.

“난 여러분보다 사랑에 더 가까이 있어요.”

나는 사랑에 대한 내 실패담을 늘어놓는 척 하면서 교묘하게 나의 우월감을 숨겨놓지. 어때? 아직도 이따위로 살고 있는 나를 보는 넌 어때? 나는 다시 옆을 돌아봐. 그리고 다시 뒤를 돌아봐. 너는 없어. 다행이야. 네가 이런 나를 보았다면 뭐라고 했을까? 날 향해 너는 어떤 표정을 지어 보였을까?

생각하지 않을래. 날 무너뜨리지 마.

사람은 변할까, 안 변할까. 나는 모르겠어. 하지만 적어도 하나는 알고 있지. 나는 안 변했어. 너에게 그런 모진 짓거리들을 하고도 나는 전혀 변하지 않았지.

언젠가 날 죽여줄래? 나도 알아. 나는 벌을 받아야 해. 그 벌을 내리는 사람이 너일 수는 없을까? 그렇게라도 너에게 했던 내 행동들에 대한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싶어. 응, 나는 그러고 싶을 뿐이야. 그저 내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싶을 뿐이야.

악몽일까? 네가 내 꿈에 나올 때. 일어나면 얼마 간의 눈물이 흐르고 있어. 악몽일까? 그럼에도 계속 꿈을 꾸기를 바란다면. 그럼에도 현실이 아닌 꿈 속에서 살고 싶어 한다면. 이제 너의 얼굴도 목소리도 생각나지 않아. 필사적으로 잊으려 노력했지. 나는 나에게 말했어.

“인간이란 게 원래 이런 존재다. 그러니 너무 미안해 할 필요도 없고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다. 내가 뭘 잘못했나? 나는 그저 인간일 뿐이다.”

나는 너를 지우려 노력했어. 내 뇌에서도, 내 심장에서도. 만약 몸 속에 들어갈 칼이 있었다면 난 너와 관련된 부위를 모조리 도려냈을 거야. 네가 생각날 때마다 나는 내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인지 깨달아야 했으니까.

사라져 줄래? 내가 너에게 이렇게 말했던가? 2호선 어딘가에서 내가 너에게 이렇게 말했던가? 아, 너에 대한 기억이 아직 나에게 남아 있구나. 사실이 그래. 너의 없음이 너의 있음을 불러와. 네가 존재하지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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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엘리트 9 : 취업 실패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나는 졸업을 하게 되었어. 그리고 취업에 실패했지. 친구들은 회계사가 되었고 사무관이 되었고 로스쿨생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남아있어.

나는 항상 친구들 앞에서 창의적인 척하며 은근히 너희같이 고리타분한 삶을 살지 않을 거라는 걸 보여주었지. 그러나 난 단지 취업에 실패한 학생일 뿐이네. 내가 내 실패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없어. 절대 없어. 세상이 날 어떻게 평가하든 난 창의적인 인재야. 난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이야. 난 한국의 스티브 잡스야. 난… 난… 병신이 아니야.

그렇게 난 스타트업에 들어갔네. 김인영의 강의에 자극을 받은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곳밖에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연기를 시작하네. 내가 스타트업을 ‘선택’해서 들어간 것처럼. 수많은 대기업이 나를 원하지만 마치 내가 스타트업을 가기로 선택한 것처럼.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마주할 자신이 없네. 아랫글 속 주인공이 바로 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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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침에 The Economist를 한 부 가지고 출근한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가치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한국 사람들은 영어라면 환장을 한다. The Economist는 얇지만 뉴욕 타임즈와 월스트리트 저널보다도 어렵고 고급스러운 영어를 사용해 기사를 작성한다. 사실 나도 전혀 읽을 수가 없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그저 사람들에게 내가 이것을 ‘읽는다’는 인식을 심어주면 그만이다. 영어를 못하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나를 우러러 본다. 나는 가끔씩 한국어 대신 영어 단어를 써주기도 한다. 가령, “마켓 벨루에이션(Market Valuation)이 상당히 언더에스티메이티드(Underestimated) 되었네요”라는 식으로.

출근을 한 뒤 모닝 커피 한 잔을 내린다. 강남역 위워크 15층에서 강남대로를 내려다본다. 마치 내가 이 건물의 주인이 된 것만 같다. 나는 이미 한국의 셰릴 샌드버그가 된 것만 같다. ‘웰컴 투 스타트업 월드…’ 스스로에게 나지막하게 외치고는 사무실로 내려간다. 사무실 책상 위에 The Economist 표지가 보이도록 내버려둔다. 직원들은 내 책상을 보고 내가 얼마나 어려운 시사 잡지를 읽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기필코 알아야 한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우선 내가 취직한 스타트업이 어떤 회사인지 말해줘야 할 것 같다. 우리는 미디어 커머스 회사이고,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적 기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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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엘리트 8 : 여름이 끝났네

그는 내게 말했어. 대학을 자퇴하겠고. 대학이 자기를 더 멍청하게 만들고 더 비겁하게 만들고 더 좁게 만든다고. 무엇을 위해? 나는 물었네. 그는 말했어. 음악을 하겠다고. 자신이 서울에 온 이유 역시 원래 음악을 하기 위해서였다고.

나는 그를 말렸네. 어리석은 짓 하지 마. 서울대학교야. 서울대학교에 다니면서도 음악을 할 수 있어. 아니, 아니야. 그는 말했네. 서울대학교라는 간판이 나를 연약하게 만들어. 나는 내 음악으로 승부를 보는 게 아니라 서울대학교라는 간판으로 나를 알리고 싶은 유혹에 빠져. 나는 느껴. 결국 내가 이 유혹에 굴복할 거라는 걸. 그래서는 안 돼. 예술가는 진실해야 해. 예술가는 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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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엘리트 7 : 정인유 교수

혹시나 대학교수가 똑똑하다고 생각하면 넌 정말 멍청한 인간이야. 대학 교수만큼 고리타분한 인간도 없지. 생명력도 없고 열정도 없지. 대학이라는 간판 뒤에 숨이 자기 몸집을 부풀리네. 그것이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법. 탁월한 학자는 매우 드물어. 탁월한 학자는 실력도 없고 병신 같은 교수들에게 공격을 받아 사라지네. 거대한 거짓. 그곳이 대학이라네.

정인유 교수는 모든 걸 이루었다고 생각하네. 무엇을 더 할까? 그는 이미 정교수인데. 정년이 보장되어 있는데. 무엇을 연구할까? 그저 연구를 하는 척, 여학생들에게 고상한 인간인 척하면 족하네.

그는 입으로는 도덕을 말하며 행동으로는 대학원 여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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