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 엘리트 9 : 취업 실패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나는 졸업을 하게 되었어. 그리고 취업에 실패했지. 친구들은 회계사가 되었고 사무관이 되었고 로스쿨생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남아있어.

나는 항상 친구들 앞에서 창의적인 척하며 은근히 너희같이 고리타분한 삶을 살지 않을 거라는 걸 보여주었지. 그러나 난 단지 취업에 실패한 학생일 뿐이네. 내가 내 실패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없어. 절대 없어. 세상이 날 어떻게 평가하든 난 창의적인 인재야. 난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이야. 난 한국의 스티브 잡스야. 난… 난… 병신이 아니야.

그렇게 난 스타트업에 들어갔네. 김인영의 강의에 자극을 받은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그곳밖에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연기를 시작하네. 내가 스타트업을 ‘선택’해서 들어간 것처럼. 수많은 대기업이 나를 원하지만 마치 내가 스타트업을 가기로 선택한 것처럼.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마주할 자신이 없네. 아랫글 속 주인공이 바로 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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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침에 The Economist를 한 부 가지고 출근한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나의 가치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한국 사람들은 영어라면 환장을 한다. The Economist는 얇지만 뉴욕 타임즈와 월스트리트 저널보다도 어렵고 고급스러운 영어를 사용해 기사를 작성한다. 사실 나도 전혀 읽을 수가 없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그저 사람들에게 내가 이것을 ‘읽는다’는 인식을 심어주면 그만이다. 영어를 못하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나를 우러러 본다. 나는 가끔씩 한국어 대신 영어 단어를 써주기도 한다. 가령, “마켓 벨루에이션(Market Valuation)이 상당히 언더에스티메이티드(Underestimated) 되었네요”라는 식으로.

출근을 한 뒤 모닝 커피 한 잔을 내린다. 강남역 위워크 15층에서 강남대로를 내려다본다. 마치 내가 이 건물의 주인이 된 것만 같다. 나는 이미 한국의 셰릴 샌드버그가 된 것만 같다. ‘웰컴 투 스타트업 월드…’ 스스로에게 나지막하게 외치고는 사무실로 내려간다. 사무실 책상 위에 The Economist 표지가 보이도록 내버려둔다. 직원들은 내 책상을 보고 내가 얼마나 어려운 시사 잡지를 읽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은 기필코 알아야 한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우선 내가 취직한 스타트업이 어떤 회사인지 말해줘야 할 것 같다. 우리는 미디어 커머스 회사이고, 세상을 좀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적 기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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