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에 귀천이 있을 수 없다

직업에 귀천이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철학적 분석 : 우리가 사는 시대에 선험이란 없다

정말 어이없는 일을 보았습니다. 어떤 가톨릭 신부가 설교를 하는데 두 가지를 말했습니다. 첫째, 신부는 타락해서는 안 되고 청렴해야 한다. 둘째, 지금 여러분의 직업이 별 볼 일 없더라도 열심히 살고 주님께 기도하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이게 얼마나 웃긴 이야기인가요? 여러분, 타락한 신부라는 건 없습니다. 신부 그 자체가 타락입니다. 하늘을 팔아서 한 몸 부지하겠다는 그 생각 자체가 이미 타락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청렴한 신부가 있다는 건지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신부는 타락의 정도만 다를 뿐 그 자체가 타락입니다. 이는 목사도 마찬가지고 미학이나 윤리학을 강의하는 교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직업을 갖겠다는 것 자체가 이미 타락입니다.

노동시장이 있습니다. 노동을 팔아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부는 하늘을 팔아 먹고삽니다. 제가 계속 말하지만 현대에 있어서 인간은 신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신은 선하다? 신을 알고 선을 알아야 저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이 신을 알고 선을 알 수 있나요? 과거의 잔류물이 여전히 권위 있는 척하며 현재에 설교를 합니다. 맑스가 그랬죠. 죽은 세대의 전통이 산 세대의 머리 위에 악몽처럼 걸려있다고. 죽은 꼰대가 살아있는 척하며 현대에 잔류물로 남아있습니다.

직업에 대해 볼까요? 직업에는 귀천이 없습니다. 어떻게 귀천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삶을 포괄하는 의미가 없는 이 시대에 말입니다. 물론 우리는 돈으로 직업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언적인 겁니다. 어찌 되었든 사회는 체계가 있어야 하고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무언가 사회 구성원을 묶을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그게 돈입니다. 그러나 돈이라는 기준은 선험이 아닙니다. 단지 사회는 기준이 필요할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도 과거의 잔류물들이 생명을 위장합니다. 기득권은 자신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 선험을 불러옵니다. 이들은 말합니다.

“내가 돈이 많아서 사회적으로 대접받는 게 아니다. 내가 훌륭한 사람이고 그렇게 돈은 자연스럽게 따라온 것이다. 나는 가난한 이들과 양적으로 다른 게 아니라 질적으로 다르다.”

개소리도 이런 개소리가 없습니다. 힘이 정의를 요청하듯 자본이 훌륭함을 요청합니다. 정의로운 사람이 힘을 얻는 게 아니라 힘이 있는 사람이 정의로움을 얻습니다. 그러나 기득권은 교묘하게 이를 감춥니다. 자기 기득권의 기반은 선험이고 그렇기에 공고해야 합니다.

이런 생각은 기득권에만 있지 않습니다. 사회적 패배자도 저런 말을 합니다. 이들은 우선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합니다. 그렇게 패배자들은 질투에 사로잡힙니다. 이들은 자기 자신을 개선하기보다는 남을 끌어내리기에 바쁩니다.

“나는 뛰어난 사람이다. 단지 지금 세상이 잘못되었을 뿐이다. 부자는 악해서 돈을 번 것이고 난 선해서 지금 가난한 거다.”

이들은 이런 생각으로 부자들을 끌어내리기에 바쁩니다. 이들은 조금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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