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분석 : 우리는 어디에도 도달할 수 없다
문학적 표현을 하자면 앤드류 테이트와 조던 피터슨은 사회적 패배자를 위한 안식처입니다. 이분들은 신을 말하고 의미를 말합니다. 하지만 현대는 의미를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취급합니다. 현대는 의미를 상실했습니다. 우리는 무의미 속에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많은 분이 이런 의미 상실을 견딜 수 없어 합니다. 그들은 무언가에 의지하고 싶어 합니다. 이때 저 두 분이 나와 전통적 가치가 해체되고 의미가 상실된 현대 사회를 비판해 줍니다. 사회적 패배자들은 저 말에 위안을 얻습니다. “그래. 내 실패는 내 잘못이 아니구나. 세상이 이상한 거구나.”라고 생각하며 자기 위로를 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이들은 자기 잘못을 사회에 돌림으로써 자기 마음속에 내제되어 있는 불만을 폭력적으로 표출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자기 실패로부터 도망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시대를 선택할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부모를 선택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저 두 분이 르네상스 시대나 중세 시대에 저런 말을 했다면 우리는 그들의 말을 귀담아들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그 시대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각 시대는 각 시대만의 세계관이 있습니다. 우리는 신이 죽고 과학이 죽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어떤 의미도 말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실존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언제나 자신의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은 소수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구시대적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옛날은 황금의 시대였지만 지금은 돌의 시대다.”라는 말은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할 때부터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는 과거를 회상하며 살고자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을 살고자 합니다. 우리는 현재를 살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합니다. 그 어떤 위로의 말도 거부하고 스스로 일어나야 합니다. 그 어떤 의미도 거부하고 무의미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앤드류 테이트와 조던 피터슨이 말하는 세계에 살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카뮈의 소설이 말하는 세계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 어디에도 우리를 바쳐줄 단단한 토대는 없습니다. 매 순간 발을 끊임없이 움직임으로서 우리는 떨어지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스스로를 갱신하십시오. 그 어디에도 도달은 없습니다. 우리는 죽는 줄도 모르고 죽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느라 너무 바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