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좌우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

철학적 분석 : 인간을 벗을 수 없는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본다

1. 타인을 이해하는 건 불가능하다

여기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행복한 이는 불행한 이를 이해할 수 없고 불행한 이는 행복한 이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종종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에게 “세상은 아름다운 면도 많아. 좋은 면을 보려고 노력해 봐.”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이들은 무식과 오만으로 이런 말을 합니다. 이들은 불행한 이들에게 이런 말을 하며 마음 깊숙한 곳에서 기쁨을 느낍니다. 거지들을 보며 위로를 얻는 중산층처럼. ‘다행이다. 내가 그래도 쟤보다는 잘살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우울한 사람의 세상에는 아름다운 면이 없습니다. 행복한 사람의 세상에 있는 밝음과 발랄함이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없는 걸 어떻게 볼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 사람의 세계를 인정하는 겁니다. 우리는 절대로 우울증에 걸린 사람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무지를 인정하고 그와 동시에 다른 사람의 세계도 인정하려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내가 나의 세계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만의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각자의 세계에 살고 있다면 사회는 어떻게 가능한가요? 사회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합의가 존재해야만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각자의 세계는 논리 형식을 공유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사회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기로 하고 곧바로 민주주의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2. 우리 시대는 합의로 돌아간다

제가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어떤 국가가 정의로운 국가인가요? 도대체 어떤 국가가 “나라다운 나라”인가요? 그 누구도 이 물음에 답할 수 없지만 누구나 이 질문에 대답합니다. 그들은 자기 생각이 마치 보편적인 진실인 것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한 채 말을 쏟아냅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정의가 무엇인지 알아야 정의로운 국가가 무엇인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의가 무엇인지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죠?

만약 플라톤 시대, 르네상스 시대라면 정의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을 겁니다. 철학을 알고 과학을 아는 똑똑한 사람들이 정의가 무엇인지 결정하여 교육이 부족한 대중들에게 알려 줍니다. 이 시대의 정치체제는 천주교의 지배구조와 똑같습니다. 일반 신도들은 신에 대해 모르고 주교와 교황은 신에 대해 압니다. 천주교 내 계급이 높을수록 그만큼 신에 대해 더 잘 압니다. 교황은 심지어 오류가 없습니다. 이들의 권위는 그들의 ‘앎(Epistemology)’에서 나옵니다. 아래 계급에 있는 사람은 그들의 ‘앎’을 신뢰하고 그렇기에 그들에게 복종합니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습니다. 인간은 ‘앎’에 대해 의심합니다. 데이비드 흄은 핵폭탄을 떨어뜨리며 심지어 과학조차도 보편적인 진실이 아니라 합의나 습관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칸트는 데이비드 흄을 읽고 깜짝 놀랍니다. 그는 자신이 흄의 글을 읽고 <독단의 잠>에서 깨어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칸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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