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뮈엘 베케트 - 고도를 기다리며
『고도를 기다리며』는 역사에 남을 명작입니다. 물론 저는 지금 도박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미래를 알 수 있을까요? 『고도를 기다리며』는 시간에 의해 사라진 수많은 글들의 일부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무슨 근거로 지금 『고도를 기다리며』가 역사에 남을 명작이라고 말하고 있는 걸까요? 투자자의 관점에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작품이 역사에 남기 위해서는 그 작품은 반드시 당대의 세계관을 반영해야 합니다. 만약 지금 누군가가 진지하게 인상주의 화풍으로 그림을 그린다면 웃음거리 말고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는 모나리자에 낙서 한 뒤샹의 그림이 현대작품이 되는 것과 똑같은 원리입니다. 뒤샹은 모나리자에 낙서를 하여 현대가 어떤 세계관 아래에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현대가 다빈치가 살던 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관 아래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트리스탄 차라가 분노 속에서 외쳤던 선언을 뒤샹은 비웃음과 야유를 통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계관을 파악한다는 것. 이건 천재의 필요조건입니다. 세계관을 모르는 자는 천재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제가 지금 저 자신을 천재라고 주장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전 멍청합니다. 그렇다면 현대의 세계관은 무엇인가요? 현대의 세계관은 경험론입니다. 그렇다면 경험론이란 무엇일까요? 제가 정말 중요한 문장 몇 개를 가져오겠습니다.
1.1 The world is the totality of facts, not of things.
이 문장은 비트겐슈타인의 『논고』에서 가져왔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얼마나 천재인가는 말할 필요도 없으니 생략하겠습니다. 『논고』 1.1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세계가 사물(things)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facts)의 총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선언으로 비트겐슈타인은 자기 철학의 뿌리가 플라톤이 아니라 흄(David Hume)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가 철학 글 내내 말했듯이 철학은 결국 실재론과 경험론의 싸움입니다. 실재론자들은 눈앞에 보이는 것들 너머에 눈 앞에 보이는 모든 걸 설명해 줄 원리가 있으며 인간이 그걸 포착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죽었고, 누군가가 돈을 잃었고, 누군가가 사랑에 빠졌고, 누군가가 자살했습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일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는데 인간은 사건 전체를 지배하는 일반 법칙을 찾아내고자 합니다. 그게 플라톤 말로는 이데아고, 아우구스티누스 말로는 신입니다. 세계가 사물(things)의 총체라고 할 때, 이는 철학적으로 세계가 이데아(신)의 총체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실재론자에게 중요한 건 눈앞에 보이는 각각의 사건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건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건을 포괄하는 원리인 이데아(신)입니다. 태양, 지구, 목성 이딴 건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건 이들 모두를 포괄하는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입니다.
자, 이 주장에 대해 흄이 반박합니다. 그는 이데아가 있는지 없는지, 신이 있는지 없는지 묻지 않습니다. 저런 질문은 수준이 너무 낮습니다. 그는 이렇게 묻습니다. “인간이 이데아(신)을 포착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 그는 『Enquiry』에서 인간에게 그럴 능력이 없음을 정말 미친 듯한 선명함으로 증명해 나갑니다. 오죽하면 칸트가 흄의 글을 읽고 독단의 잠에서 깨어났다고 말했을까요? 흄의 천재성 역시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여러분 주위에 누군가가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그 사람은 솔직히 좀 멍청한 사람입니다. 질문의 수준 자체가 매우 낮습니다. 그 사람은 이렇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