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지능이 떨어지는 인간만이 타인에게 삶의 정답을 구한다

관조라는 고상한 미명 아래 도피하는 영혼의 비겁함을 폭로하고, 치열한 삶의 격정 속으로 뛰어들어야만 진정한 통찰과 창조가 가능하다고 역설하는 글입니다.

니체 - On the Genealogy of Morality

관조(觀照)라! 아, 그 얼마나 고상하고 초연한 단어인가! 그러나 그 우아한 가면 뒤에 숨겨진 것은 실상 삶의 격랑으로부터 달아나려는 왜소한 영혼의 비겁한 몸짓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관조란 "나는 세계의 소란으로부터 분리된 채, 저 높은 곳에서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제3의 눈을 가졌노라"고 선언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허나, 세계 '밖'에서 세계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다는 그 오만한 착각이야말로 모든 도피와 자기기만의 가장 정교한 형태이다. 격정, 이 생명의 원초적 불꽃이 부재한 존재가 과연 무엇을 잉태하고 창조할 수 있단 말인가? 무관심한 미적 주관을 내세우며 판단의 유희에 잠긴 저 칸트적 인간 유형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란 결국 창백한 관조의 유령, 생명력 없는 사유의 그림자뿐이지 않은가? "나는 번잡한 도시가 싫다. 원초적 인간의 본질은 저 소박한 오두막에 있다"고 속삭이는 목소리, 그것은 복잡한 현실을 감당할 힘이 없는 자가 만들어낸 자기 정당화의 멜로디일 뿐이다.

예술은 관조의 산물이 아니라 삶 그 자체의 가장 농밀한 표현이다. 그리고 그 삶이란 결코 세계 '밖'의 정적인 관망이 아니라 세계 '안'에서의 치열한 투쟁이며, 계절의 모든 기후와 인간 조건의 모든 선과 악, 모든 환희와 모든 절규를 온몸으로 겪어내는 역동적인 과정이다. 관조라니! "나는 어떠한 편견이나 욕망 없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습니다"라는 선언만큼이나 공허하고 우스꽝스러운 주장이 또 있겠는가! 모든 인식은 이미 하나의 관점이며 모든 관점은 특정한 의지와 힘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해석일 뿐이다.

성(性)이라는 현상 하나만 보더라도 그것이 어찌 냉정한 관조의 대상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야말로 두 의지 사이의 미묘하고도 격렬한 작은 전쟁이며, 서로가 서로를 정복하고 소유하려는 원초적 욕망의 투기장이 아니던가! 소유욕과 질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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