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conomist 2025년 3월 29일호
Article: Even priests need the free market
헨리 워드 비처라. 19세기 브루클린에서 그 양반 교회는 돈 좀 만졌다고 하지. 강 건너 뉴욕에서도 그 인간 설교 들으려고 "비처 보트"를 타고 몰려들었다니 말 다 했지. 설교 팔아서 돈 벌고, 그 돈으로 남북전쟁 연대에 소총까지 쥐어줬다? "비처 연대", "비처 성경"이라. 씨발, 종교가 돈이 되고 돈이 종교를 부르는 완벽한 증거 아닌가. 결국 간통 스캔들로 추락했지만 수십 명으로 시작한 교회가 수천 명으로 불어났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셀러브리티 목사라. 웃기지도 않는 광대극이다.
지금 선진국에서 기독교는 빌빌거리고 있다. 1999년 70%였던 미국 교회 출석률은 최근 45%까지 곤두박질쳤고, 가톨릭의 본산이라는 이탈리아에서는 지난 10년간 신자 수가 거의 반 토막 났단다. 성직자들이 사람들을 다시 끌어들이려고 별짓 다 해봤겠지. 복음서 저자들은 기적에 호소했고 십자군 교황들은 아예 칼을 썼다. 19세기 영국 퀘이커 교도들은 신도들의 물질적 필요를 채워주면 신앙심이 깊어질 거라 믿었다지. 전부 다 병신 같은 짓거리였다. 본질을 못 본 거지.
다행히도, 이제 종교를 연구하는 경제학자들이 늘어나 절망에 빠진 성직자들에게 조언을 해줄 수 있게 되었다니 시대가 변하긴 변했나 보다. 첫 번째 교훈은 실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전 세계 종교 기관들은 오랫동안 성경 공부반을 열고, 종교 학교에 돈을 대고, 염가 서점을 운영해왔다. 지식이 경건함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순진한 가정 하에 말이다. 옥스퍼드 대학의 장-폴 카르발류와 그의 동료들에 따르면, 이 가정은 틀렸을 가능성이 높다. 터키를 보니 종교 교육을 오래 받을수록 선거에서 종교 후보에게 투표할 가능성이 낮아진단다. 카르발류는 이미 교육을 통해 신앙심을 증명했으니 정치로 보여줄 필요가 없기 때문일 수 있다고 제안하지만 냉소주의자들은 다른 메커니즘을 의심한다. 아마도 종교 교육도 주류 학교 교육처럼, 사람들에게 도그마에 의문을 제기하는 데 필요한 도구를 제공하는 것은 아닐까? 지식은 때로 믿음의 가장 큰 적이 되기도 하니까. 멍청한 대중을 다루려면 너무 똑똑하게 만들어서는 안 되는 법이다.
자선 사업도 별 효과가 없어 보인다. 퀘이커 신앙과 초콜릿으로 유명한 캐드버리 가문은 1890년대 영국 버밍엄 근처에 본빌이라는 마을을 건설했다. 공장 노동자들에게 저렴한 주택과 의료 서비스를 제공했지. 그들의 복지는 향상되었겠지만 그렇다고 더 신앙심이 깊어졌을 것 같지는 않다. 2017년 맨체스터 대학의 잉그리드 스톰은 31개 유럽 국가의 인구 조사를 분석한 논문을 발표했는데, 사람들이 가장 종교적일 때는 가난할 때였다고 한다. 실제로 현대 미국에서는 빈곤에서 벗어나는 길이 종교라고 설교하며 별다른 지원은 제공하지 않는 복음주의 거대 교회들이 가장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기도가 번영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실제적인 선물보다 더 매력적이라는 반증이다. 인간은 결국 희망을 먹고 사는 존재니까. 비록 그것이 헛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