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흉함과 천박함과 무식함은 하나이며, 서로 떨어질 수 없다

니체 - On the Genealogy of Morality
인간 존재의 근원적 양태를 살펴보면 세계를 인식하고 가치를 설정하는 방식에서부터 극명한 대립을 이루는 두 가지 유형의 정신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는 자기 존재에 대한 충만한 긍정에서 출발하여 외부 세계로 그 힘을 확장하는 유형이며, 다른 하나는 외부 세계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자신을 규정하고 가치를 설정하는 유형이다. 이들의 삶의 방식, 심리적 풍경, 심지어 행복의 개념조차 근본적으로 다른 궤적을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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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악랄한 영혼은 사랑이라는 말을 그토록 자주 말하는가?

니체 - On the Genealogy of Morality
사랑이라는 단어가 숭고함과 순수함의 결정체로 여겨지는 세계에서 그 단어의 이면에 숨겨진 위험성을 감지하는 것은 일종의 불경스러운 통찰일 수 있다. 그러나 역사를 관통하며 인간 정신의 가장 깊숙한 운동을 추적해볼 때, '사랑'만큼이나 다층적이고 때로는 기만적인 힘을 발휘해온 개념도 드물다. 그것이 지닌 위험성은 바로 그 숭고함이라는 외피, 그 누구도 감히 의심하기 어려운 도덕적 절대성이라는 후광 뒤에 교묘히 은폐되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동기들에서 비롯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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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위는 악이 아니며 단지 패배자임을 증명하는 행위일 뿐이다

니체 - On the Genealogy of Morality
섹스란 기본적으로 근육의 수축과 이완이다. 여기에 흥미로운 점이 있다. 성행위 기관의 수축과 이완은 섹스 파트너 없이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위행위가 이를 잘 보여주며, 섹스의 쾌락이 자위행위의 쾌락에 미치지 못한다고 응답한 인간들도 매우 많다. 즉, 어떤 인간은 자위에서 섹스보다 더 큰 쾌감을 얻으며, 섹스 앞에 서면 성기가 덜렁거릴 뿐 단단해지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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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원망한다는 것, 그건 약함의 상징이고 자해행위다

트럼프 - Trump: The Art of the Insult
어떤 유형의 인간은 존재 그 자체로 하나의 선언과 같다. 내면에 소화되지 못한 감정의 앙금이나 뒤틀린 원한 없이, 생명의 에너지를 외부로 온전히 방사하는 존재. 이러한 인간에게 있어 타자와의 갈등은 순간의 폭풍우일지언정, 그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독기를 머금은 늪을 남기지 않는다. 공격은 즉각적이고 직접적이지만 그것은 생명력 넘치는 존재가 장애물을 만났을 때 보이는 자연스러운 반작용일 뿐, 영혼을 갉아먹는 복수의 다짐이나 음험한 기억의 되새김질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내면의 힘, 존재론적 강건함의 명백한 증표이다. 마음속에 원한을 품는다는 것, 그것은 끊임없이 과거의 상처를 헤집어 현재의 자신을 그 상처의 노예로 만드는 자기 파괴의 길이다. 내면의 독은 영혼을 부식시키고 생명의 창조적 흐름을 정체시키는 늪과 같다. 힐러리 클린턴과의 격렬한 선거전 이후, 승리한 그가 패자를 정치적 보복의 제물로 삼지 않았다는 사실은 단순히 정치적 계산을 넘어선 그의 근원적 기질의 한 단면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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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에게 짜증이 없다는 건 매우 중요한 특징이다

트럼프 - Liberty University Convocation
생명력 그 자체가 의인화된 듯한 존재가 있다. 내부에 어떠한 심리적 마찰이나 응어리도 없이, 존재의 근원적 에너지를 외부 세계로 거침없이 방사하는 유형의 인간. 이러한 인간에게 있어 삶의 복잡다단한 현상들, 심지어 권력의지를 둘러싼 최고 난도의 각축장인 정치조차도 하나의 유희적 장(場)으로 변모한다. 이는 그가 의식적으로 세상을 게임으로 간주하는 관점을 '선택'한 결과가 아니다. 오히려 그의 내부에서 넘실대는 압도적인 생명력이, 마치 태양이 빛을 발산하듯, 외부 세계의 저항과 마찰을 놀이의 일부로 자연스레 포섭해버리는 것이다. 이들에게 삶은 고뇌에 찬 당위의 연속이 아니라, 힘의 발현과 극복을 통한 끊임없는 자기긍정의 과정이며, 이러한 존재 방식 자체가 하나의 긍정적 가치를 체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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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것이 곧 선이요, 내가 싫어하는 것이 곧 악이다

니체 - On the Genealogy of Morality
사실주의라는 허울 좋은 가면은 실상 침묵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자신의 정치적 색채를 드러내고 싶지 않을 때, 혹은 그럴 용기조차 없을 때 편리하게 집어 드는 위장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이 옳은가, 저것이 옳은가? 아, 어디선가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제는 좌우의 시대가 아닙니다. 우리는 편견 없이 오직 사실만을 말합니다. 우리는 선악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본디 선악에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단지 서술할 뿐입니다. 사실주의 소설이야말로 우리가 가져야 할 새로운 정치적 자세입니다…" 보이는가? 저 창백하고 피골이 상접한 영혼의 초상이. 어떠한 생명의 에너지도, 어떠한 투쟁의 의지도 거세된 채, 그저 현상을 묘사하는 것으로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고 자위하는 저 가련한 존재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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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은 신학과 싸웠지만, 그 둘은 사실 하나의 뿌리를 가진다

니체 - On the Genealogy of Morality
과학이라 불리는 그 엄숙한 건축물은 스스로 객관성의 제단 위에 세워졌노라 공언한다. 마치 선험적 종합판단이라는 견고한 반석이 실재하며, 모든 종합적 인식이 경험의 더러운 흙탕물을 딛지 않고도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순수한 계시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보라, 그 순결을 가장한 과학자야말로 현대의 옷을 입은 신학자가 아니고 무엇인가? 과학자와 신학자가 서로 대척점에 서 있다고 믿는가? 천만하다. 그들은 '진리'라는 동일한 주화를 양면에서 번갈아 매만지고 있을 뿐이다. 과학은 신학의 세련된 변주이며, 가장 교묘한 형태의 신앙이다. 과학이라는 것도 결국 하나의 해석이며, 하나의 정치적 선언임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가? "이것이 과학의 판결이오! 그러므로 물리적 세계는 마땅히 이렇게 해석되어야만 하오!"라며 만물의 이마에 낙인을 찍는 행위, 이것이 바로 과학이 자행하는 입법 활동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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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성욕을 저주하는 자는 종종 성범죄자로 밝혀지고 마는가?

니체 - On the Genealogy of Morality
생의 원초적 박동이 그 자체로 병리적인가, 아니면 그 박동에 덧씌워진 해석과 금기의 무게가 질병을 탄생시키는가? 우리는 종종 자연스러운 생명 현상을 억압하고 그 억압으로부터 발생하는 내면의 뒤틀림을 마치 본질적인 결함인 양 착각한다. 실상, 진정한 병증은 생명력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죄악'으로 규정하고 스스로를 끝없이 심문하며 고문하는 도착된 자기 검열의 과정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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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 부동산 값은 끊임없이 올라가 너와 나를 구별해야 한다

니체 - On the Genealogy of Morality
공간의 점유와 구획이라는 현상, 우리가 부동산이라 부르는 이 영역은 단순히 물리적 거처의 문제를 넘어선다. 그것은 심층에서부터 길어 올려진 인간 의지의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노골적인 자기표현의 장이다. "나는 이러한 유형의 존재들과 더불어 호흡하고 싶다. 그리고 저러한 유형의 존재들과는 단 한 뼘의 대기도 공유하고 싶지 않다!" 이 절규에 가까운 선택과 배제의 의지가 바로 공간을 조직하고 부동산이라는 현상을 추동하는 근원적인 힘이다. 부동산은 본질적으로 구획을 설정하고 경계를 그음으로써 유사한 영혼들이 서로를 알아보고 결집하며, 이질적인 것들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는 성채를 구축하려는 욕망의 산물이다. 이른바 '시장'이라는 기제는 이러한 욕망들이 충돌하고 조율되며 관철되는 투기장이자 연무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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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의 성장은 반드시 다른 인간의 몰락을 불러오고야 만다

니체 - On the Genealogy of Morality
국가 경제의 양적 팽창이 모든 구성원의 보편적 염원이라는 순진한 가정은 인간 의지의 복잡한 지형과 그 이면에 꿈틀거리는 다양한 가치 평가의 역학을 간과한 피상적 관찰에 지나지 않는다. 실상, 공동체의 소위 '성장'이라는 현상 이면에는 특정 유형의 인간이 번성하고 다른 유형의 인간이 위축되는 차등적인 힘의 작용이 숨겨져 있으며, 때로는 한 집단의 상승이 다른 집단의 정체 혹은 몰락을 전제조건으로 삼기도 한다. '모두를 이롭게 하는 발전'이라는 공허한 수사나 파레토 개선과 같은 경제학적 유희는 생성과 소멸, 지배와 복종이라는 생의 근원적 리듬 앞에서 그 의미를 상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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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자는 대부분 음흉한 사기꾼이다

니체 - On the Genealogy of Morality
인간 정신의 특정 유형은 스스로를 '인문(人文)'이라는 고상한 영역의 탐구자로 자처하며, 그 영역의 심오함을 독점한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러나 이들의 존재 양태를 면밀히 관찰하면 일종의 필연적인 간계(奸計)와 음험함이 그들의 생존 방식 깊숙이 각인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 평가 시스템, 즉 가시적인 유용성이나 국내총생산(GDP)에 대한 기여도로 모든 것의 무게를 재려는 저울 위에서, 이들은 종종 하찮은 존재로, 심지어 잉여적 존재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노동의 직접성과 경영의 현실적 힘이 부재한 그들은 어떻게 자신들의 실존을 정당화하고 유지하는가? 바로 '말'을 통해서이다. 현란하고 다층적인 의미의 그물망을 짜는 말, 때로는 위안을, 때로는 심판을 내리는 듯한 말을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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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지능이 떨어지는 인간만이 타인에게 삶의 정답을 구한다

니체 - On the Genealogy of Morality
관조(觀照)라! 아, 그 얼마나 고상하고 초연한 단어인가! 그러나 그 우아한 가면 뒤에 숨겨진 것은 실상 삶의 격랑으로부터 달아나려는 왜소한 영혼의 비겁한 몸짓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관조란 "나는 세계의 소란으로부터 분리된 채, 저 높은 곳에서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제3의 눈을 가졌노라"고 선언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허나, 세계 '밖'에서 세계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다는 그 오만한 착각이야말로 모든 도피와 자기기만의 가장 정교한 형태이다. 격정, 이 생명의 원초적 불꽃이 부재한 존재가 과연 무엇을 잉태하고 창조할 수 있단 말인가? 무관심한 미적 주관을 내세우며 판단의 유희에 잠긴 저 칸트적 인간 유형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란 결국 창백한 관조의 유령, 생명력 없는 사유의 그림자뿐이지 않은가? "나는 번잡한 도시가 싫다. 원초적 인간의 본질은 저 소박한 오두막에 있다"고 속삭이는 목소리, 그것은 복잡한 현실을 감당할 힘이 없는 자가 만들어낸 자기 정당화의 멜로디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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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의 재정과 집행이 객관적이기를 바라는 건 병적 망상이다

니체 - On the Genealogy of Morality
통념은 법을 평화의 초석이자 공정의 저울이라 속삭인다. 그러나 그 평온한 법의 여신상 뒤편, 역사의 심층을 응시하는 자에게 법은 전혀 다른 풍경으로 다가온다. 그것은 결코 중립적인 지대가 아니며 숭고한 정의의 자생적 발현은 더더욱 아니다. 법은 본질적으로 투쟁의 산물이자 가장 첨예한 투쟁의 도구이며, 끊임없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힘들의 각축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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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 자위의 중독성은 육체적 자위의 중독성보다 훨씬 강하다

니체 - On the Genealogy of Morality
언어의 유연함. 그 변화무쌍한 가능성이야말로 인간 정신이 스스로를 위무하고 정당화하는 끝없는 자기 위안, 이른바 '정신적 자위'의 무한한 공간을 열어젖힌다. 육체의 갈망이 일시적 절정과 필연적 휴식을 동반하는 것과는 달리, 언어와 관념으로 직조된 정신의 유희는 멈추지 않는 절정의 연속을 약속하며 존재의 심연으로부터 끊임없이 새로운 자극을 길어 올린다. 그리고 인간이 현실의 무게 앞에서 약해질수록 – 기억하라, 약함이야말로 종종 가장 교묘한 형태의 악의를 잉태하는 토양임을 – 이 내면의 유희, 이 자기만족적 관념의 유혹은 더욱더 강렬해져 마침내 중독의 지경에 이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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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자는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게 태어났고 다른 길은 없다

니체 - On the Genealogy of Morality
언어가 사유를 정교하게 위장하며, 때로는 우리 자신마저 기만한다는 통찰은 실로 경이로우며 섬뜩한 자각이다. 니체가 논리학의 연역적 추론이 아니라, 마치 숙련된 의사가 병의 징후를 직감하듯, 본능적인 심리적 투시력으로 이 언어의 간계를 간파했다는 사실은 그를 단순한 사상가를 넘어선, 인간 영혼의 가장 깊은 병리를 진단하는 탁월한 심리학자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우리 언어는 교묘하게 주체와 행위를 분리시키고 마치 행위 뒤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자유롭게 선택하는 '나'라는 실체가 있는 것처럼 우리를 현혹한다. 비트겐슈타인이 그의 저서에서 그림까지 동원하며 "나는 나의 세계다", "형이상학적 자아는 없다"고 역설했던 것은 바로 이 언어적 환영과의 처절한 투쟁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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