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스 라벨 : 볼레로(Bolero), 그 섹시함에 대하여

Ravel - Bolero

앨범리뷰 : 모리스 라벨 – 볼레로 (8/10)

암막 커튼 사이로 새파란 빛이 새어들어왔다. 일어나야 하는 시간이구나, 그녀는 눈을 한 번 질끈 감으면서 생각한다. 허락한다면 하루종일 눈을 감을 수도 있을텐데, 시간은 그녀에게 절대로 그걸 허락하지 않는다. 시간은 가능한 만큼 작고 작게 쪼개져서 삶을 조정한다. 일어나야 할 시간 있고, 출근해야 할 시간이 있고, 밥을 먹어야 할 시간이 있다. 그녀가 시간을 통제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그녀의 삶을 통제한다. “정신 차려보면 한 달이 지나가 있어요.” 그녀는 시간을 소유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이렇게 표현하곤 했다.

글을 써야 해서 저번 주에 편지를 보내지 못했어요, 그녀는 편지에 이렇게 적으려다 그냥 지워 버린다. “어디에 글을 쓰고 있어요?” 라던가 “어떤 글을 쓰고 있어요?” 라는 질문이 답장으로 올 것만 같았고 거기까지 말하는 것은 너무 피곤한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글을 써야 해서 저번 주에 편지를 보내지 못했어요.” 라는 말은 너무 잘난 체 하는 듯한 표현이었다. 일주일에 한 통 뿐인 편지를 쓰지 못할 만큼 그녀가 바쁜가? 분명히 아니다. 그저 몇 군데에 자그마한 글들을 보낼 뿐이며, 그것이 잘 쓴 글인지 조차 확신하지 못한다. 그리고 비록 그것 때문에 자살충동에 가까운 기분을 심장 속에 담아두며 살아가고 있지만, 그 역시 일주일에 한 번 뿐인 편지를 놓을 충분한 이유는 아니었다.

글은 숭고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왜 이렇게 쓰레기 같은 글들만 쓰는 것일까, 나는 도대체 이 짓거리를 왜 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왜 이렇게 형편없는 인간일까. 그녀는 이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 질문들은 하루 종일 그녀의 머리 속에서 그녀를 괴롭히며 “차라리 죽는 것이 세상에 더 이로운 일이 아닐까? 네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라고 외쳐댄다. 그녀는 아니야, 아니야, 를 외치며 다시 연필을 들고 노트에 글을 쓰기 시작하지만 “글을 써야 해서 저번 주에 편지를 보내지 못했어요.” 같은 문장이 나올 때마다 극심한 절망감에 사로잡혀 종이를 찢어버린다. 나는 아직도 나의 에고를 버리지 못하고, 글을 쓰는 것 앞에서도 하찮은 나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구나. 나는 정말 쓰레기 같은 인간이구나. 내가 글을 쓰는 것은 ‘글’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뛰어난 인간’ 이라는 것을 주장하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하찮다, 정말 하찮아. 나라는 인간은 정말 시시하고, 별 볼 일 없고, 쓰레기라는 말 말고는 표현할 단어가 없구나.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고는 글 쓰는 걸 잠시 멈춘다. 에고를 버릴 수 없다면 글을 쓸 수 없어, 제발 나를 버릴 수 있게 도와주소서, 라고 신에게 기도하면서.

“편지 잘 받았습니다. 저는 당신이 라벨의 볼레로에 대해 이야기 한 것에 대해 일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편지를 통해서 볼레로를 그런 식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당신의 주장은 매우 설득력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는 이 편지를 통해서 제가 왜 ‘그럼에도’ 볼레로를 좋아하는지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할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다만 제가 볼레로가 좋은 곡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당신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녀는 이렇게 다시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그녀는 수요일마다 이메일 구독자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고, 그 가운데 몇 명이 꽤나 긴 답장들을 보내오곤 했었다. 그건 그녀의 인생에서 거의 유일하게 기쁜 일이었다. 누군가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눈다는 것은 그녀에게 너무 힘든 일이었다. 말은 나도 모르게 나와 버린다. 말을 통제하는 것은 너무 어렵고, 대부분의 말들은 아름답지가 않아. 그녀는 ‘말’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글이 말보다는 좋다, 적어도 몇 번을 고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누군가와 대면해서 말할 때 보다는 거짓말을 훨씬 덜 하게 되는걸. 그녀는 이런 이유로 ‘글’로 의견을 나누는 것을 언제나 더 선호했다. 누군지도 알 수 없는 메일 구독자들은 이렇게 그녀의 말동무 상대가 되어주었고 그건 너무 기쁜 일이자 고마운 일이었다.

“볼레로의 처음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스네어 드럼의 그 유명한 리듬과 함께 비올라와 첼로가 베이스 라인을 연주합니다. 그리고 그 위로 플루트가 너무나도 익숙한 볼레로의 멜로디를 연주하죠. 이 때 제게 들리는 것은 드럼이나 현의 튕겨짐 그리고 목관 악기들이 아닙니다. 저는 엄청난 소리의 공백을 듣습니다. 끊임 없이 반복되는 리듬과 멜로디 사이를 관통하는 소리의 공백. 이게 저를 단숨에 음악에 집중하게 합니다. 이 공백이 어떻게 채워질 것이며, 언제까지 유지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그녀는 이렇게 글을 쓰고 몇 번을 다시 읽어본다. 그래, 이건 정말로 내가 느끼는 것이고 저 문단은 진솔한 문단이다, 라는 생각이 들자 글을 이어서 써나갈 수 있게 되었다.

“제가 생각할 때, 라벨이 저 소리의 공백을 채운 방법은 음색을 통해서인 것 같습니다. 볼레로의 멜로디는 단 두 개 밖에 없습니다. 도입부에서 플루트와 클라리넷이 첫 번째 멜로디를 연주했고, 뒤이어 바순이 두 번째 멜로디를 연주했습니다. 볼레로는 음악이 끝날 때까지 이 두 개의 멜로디만을 가지고 움직입니다. 라벨이 ‘볼레로는 음악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은 어쩌면 이 이유에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단순한 멜로디가 여러 악기로 연주될 때, 저는 솔직히 일종의 쾌락을 느낍니다. 똑같은 멜로디가 음색에 따라서 이렇게 다르게 들린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볼레로에서 ‘크레센도’는 분명 단지 ‘점점 더 세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볼레로에 있는 공백을 악기의 음색으로 채우겠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특히 7분 20초에 들려오는 피콜로와 프렌치 호른, 그리고 첼레스타의 음색은 볼레로의 단순한 멜로디를 전혀 단순하지 않게 들리게 만듭니다. 그 음색들의 기묘한 조합은 매우 이국적인 소리로 제게 다가옵니다. 다만, 그것이 라벨이 의도했던 것처럼 ‘스페인스러운’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스페인에 대해 하나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다시 글을 멈춘다. 만약 볼레로에 대해 느낀 매력을 글로 모두 다 써야한다면 편지가 너무 길어질 것 같았다. 멜로디에 대한 분석을 써야할까? 두 개의 멜로디가 리듬에 딱 달라붙지 않고 떠다니는 느낌이 매력적이라고 써야할까? 아니면 첫 번째 멜로디는 C major 스케일에 있는 음들로만 이루어져 우리가 따라 부르기 쉬운 반면 두번째 멜로디는 C major 스케일이 아닌 Bb, 심지어 Eb과 Ab이 들어가 훨씬 이국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고 말해야 할까? 아니다, 이 역시 볼레로의 매력이지만 이것까지 쓰면 글이 너무 길어질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고 볼레로의 마지막으로 바로 넘어가 버린다.

“제가 볼레로를 좋아하는 이유는 또 그 음악의 마지막에 있습니다. 이 단순한 멜로디의 반복을 라벨은 정말 멋지고 섹시하게 끝내 버립니다. 줄곧 C major에서 놀던 음악은 15:30초에 갑자기 E major로 올라갑니다. 이 갑작스러운 움직임, 저는 그것 때문에 줄곧 의자에 기대어 발을 흔들며 음악을 듣다가 갑자기 몸을 앞으로 숙여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스스로에게 ‘지금 무슨 일어난 거지?’ 하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E major로 올라간 이 음악은 이제 리듬에 지배를 당합니다. 모든 악기가 똑같은 리듬으로 연주되고, 저는 더 이상 악기를 구분할 수 조차 없게 됩니다. 한 마디로 볼레로는 절정, 오르가즘, 패닉의 상태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리듬이 무너지면서 다시 C major, 즉 원래의 자리로 돌아옵니다. 라벨의 음악을 듣고 몇 몇 사람들은 성적 충동으로 인해 기절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는 분명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수많은 반복 끝에 절정으로 치닫는 음악, 그리고 그 짧은 절정을 마치고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오는 음악, 이를 ‘성적(性的)’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 정도로 멈추자,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며 편지를 마친다. ‘보내기’ 버튼을 누르기 전, 그녀는 다시 편지를 몇 번 읽어본다. 글이 만족스럽다고 생각되자 그제서야 그녀는 ‘보내기’ 버튼을 누른다. 한숨이 절로 나온다. 몸에 있던 모든 힘이 다 빠진다. 시계는 오전 10시를 가리킨다. 오늘 수업은 1시부터이고 집에서 학교까지는 걸어서 20분 정도가 걸린다. 이제 가야지, 그녀는 백팩에 노트북과 몇 개의 책을 집어넣고 집을 나선다. 조금은 통이 넓은 청바지에 하얀색 컨버스를 신고, 위에는 검은색 아디다스 져지를 걸친다. 벌써 봄이구나, 밖을 나가고서야 그녀는 ‘계절’을 알아챈다. 언제쯤 내가 시간을 통제할 수 있을까? 그런 날은 아마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일까지 또 하나의 글을 써서 보내주어야만 한다. 어떻게 이야기를 전개하지, 어떤 인물을 집어넣어야 할까, 이 모든 것들을 생각하자 다시 머리가 아파온다. 하지만 글을 쓴다는 것은 숭고한 것이다. 글 앞에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 자신을 하나의 제물로 바쳐야 한다. 그녀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다시 별 볼 일 없는 하루를 시작한다.

김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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