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 폰 트리에 : 살인마 잭의 집 영화리뷰

The house that Jack Built

영화리뷰: 라스 폰 트리에 – 살인마 잭의 집 (8.5/10)

죽음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그것은 고통스럽고 끔찍하다. 하지만 죽음을 소재로 한 예술작품은 아름답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들었을 때 나는 그 압도적인 아름다움에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그 소리는 내 마음 속으로 거침없이 들어와서 나에게 어떤 초월적 세계를 보여주었다. 레퀴엠은 이 거칠고 폭력적이며 그 어떠한 구원도 찾아볼 수 없는,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경험 세상 너머에 또 다른 어떤 세상이 있음을 너무도 분명하게 알려주었다. 그곳은 아름다움의 세계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세계다. 꽃의 아름다움은 꽃을 이루고 있는 화학적 요소로 환원할 수 없다. 모차르트 음악의 아름다움을 화성의 진행 혹은 화성 요소의 분석으로 환원할 수 없다. 모차르트 음악이 왜 이토록 아름다울까? 우리는 그의 ‘천재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결국 모차르트의 음악이 왜 아름다운지 설명할 수 없다는 것과 똑같다. 무언가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천재’라는 개념을 가져온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혐오스러운 것들. 예술가는 그것들조차 아름다운 어떤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들라크루아의 ‘un lit defait’를 보라. 현실 속에서 헝클어진 침대는 결코 아름답지 않다. 하지만 들라크루아가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했을 때, 헝클어진 침대는 갑자기 아름다움을 얻는다. 그의 그림은 아주 찰나일 수도 있지만 우리 마음을 뒤흔들어 놓고, 또 어떤 다른 세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예술은 한때 인간을 구원의 세계로 이끌었다. 이 쓰레기 같은 세상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고, 인간은 단지 진화된 원숭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고, 영혼이든 천국이든 이데아든 당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구원의 손길, 한때 그것이 예술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예술은 구원의 손길이 되는 것을 포기했다. 인간은 더 이상 구원 받을 수 없다. 이 쓰레기 같은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그냥 여기서 살다가 여기서 죽는 것이다. 태어남과 죽음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인간은 <유전자 기계>에 불과하며, 영혼 같은 <주술적> 단어들은 계몽되지 못한 자의 언어이자 미신이다. 그렇게 들라크루아의 ‘un lit defait’는 트레이시 에민의 ‘My bed’가 된다. 예술은 이제 이 쓰레기 같은 세상을 그냥 있는 그대로 묘사할 뿐이다. 하지만 그게 정말 예술이 될 수 있을까? 트레이시 에민의 ‘My bed’는 뒤샹의 작품 ‘샘’의 복제품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이렇게 예술이 밑으로 밑으로 추락하고 있을 때 벼락같이 라스 폰 트리에가 나타난다. 그는 영화를 선보일 때마다 엄청난 비난에 시달리는데, 그 유일한 이유는 그가 뛰어난 영화감독이기 때문이다. 그는 영화로써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질문을 던진다. 그래, 여기 멍청한 계집 몇 명이 있고 내가 만든 캐릭터는 그 계집들을 죽였다. 젊은 여자의 봉긋한 가슴은 너무나도 아름다웠기에, 내 캐릭터는 그 한 쌍의 가슴을 잘라서 지갑으로 만들었다. 봄날에 벚꽃이 떨어지듯이 그녀의 가슴에서 피가 흩날린다. 고개는 70도 정도 왼쪽으로 기울었고, 가슴에는 이제 두 개의 커다란 구멍만이 남아있다. 그녀는 죽었다. 하지만 저 죽은 모습을 보라, 카메라에 담긴 그녀의 육체를 보라, 고통이 끝난 자의 표정을 보라. 아름답지 않은가? 당신은 정말 그녀의 모습에서 일말의 아름다움도 느끼지 못했는가? 느꼈다면, 시체를 보고 아름다움을 느낀 당신은 정상일까?

아, 잠깐 여기 또 다른 멍청한 계집이 있다. 그리고 그 계집이 낳은 더 멍청한 아들 두 명도 있다. 넓은 들판에서 그들은 숨고, 달린다. 내 캐릭터의 총알을 피해서. 내 캐릭터는 7살 난 아이에게 총을 겨눈다. 오! 멍청한 아들들! 그들은 내 캐릭터가 총을 겨누는지도 모르고 어미 품에서 나와 들판을 뛰어다닌다. 빵! 그 아이들의 대가리가 그대로 날아간다. 다리도 하나 날아간다. 내 캐릭터는 그 아이들의 시체를 나무에 고정시킨다. 그리고 어미를 불러 그녀의 손에 빵을 하나 쥐어준다. “자식들에게 먹을 것을 좀 줘야지.” 그녀는 몸을 벌벌 떨면서 자기 아들들의 시체에 빵을 들이민다. “빵을 안 좋아하나보군. 입 속에 더 집어넣어봐.” 눈물과 공포로 가득한 그녀의 눈망울. 아, 아름답지 않은가? 어쩔 줄 몰라하는 저 가녀린 여자의 눈동자가 아름답지 않은가? 카메라에 담긴 그녀의 모습이 아름답지 않은가? 당신도 아름다움을 느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정상일까? 도덕률은 어디로 갔을까? 당신이 느끼는 그 감정은 도대체 무엇일까? 그러니까, 당신은 미친 게 아닐까?

현실에서 연쇄 살인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그것은 고통스럽고 끔찍하며 흉물스럽다. 하지만 <연쇄 살인을 소재로 한 영화>는 아름다울 수도 있다. 그렇다면 예술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정말 예술이 현실의 도덕률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유로울 수 있을까? 근친, 소아성애, 존속 살인을 <소재>로 예술 작품을 만들어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 – 아, 오이디푸스여! 라스 폰 트리에는 이번 영화를 통해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는 정해진 질문에 답을 내리려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라스 폰 트리에는 조금 우울하고, 조금 절망적이며, 조금 염세적이고, 많이 뚱뚱한 현대판 플라톤이다.

김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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